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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14:6~12절 “찾자 잘될 때도 어려울 때도 하나님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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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3-10-27 11:30    조회 404    댓글 0  
 
대하14:6~12절  “찾자 잘될 때도 어려울 때도 하나님을 찾자”  2023.10.29.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에도 혼자 하셨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어  새사람 되게 하심 역시 십자가에서 홀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구원사역은 혼자가 아닌 사람들을 세우셔서 일하시므로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맞는 일꾼을 찾고 계신다는 거지요 그래서 두 가지 말이 생겨났는데 하나는 하나님 나라 광고판에 求人(구인)광고가 늘 뜬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사람은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신다>는 말이 있다는 겁니다.

6절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그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고 전쟁이 없어서 아사가 견고한 성읍들을 건축했답니다. 몇 년 동안 평안했는지를 1절에 <10년>이라고 알려줍니다. 왜 평안을 주셨는지를 또 알려줍니다. 2절에 선과 정의가 아사의 행동방식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3절에 <이방제단과 산당과 쇠로 녹여 만든 주상과 나무로 만든 우상을 찍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만이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4절에 <여호와를 찾게 했고 말씀과 명령에 순종케>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5절에 그 결과 이런 아사의 통치 아래 나라가 평안했다는 거거든요 그러면서 나라와 가정 그리고 개인의 평안이 어디서 오는지를 오늘 6절 본문에서 알려준다는 거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다는 거지요 여기서 깨닫습니다. 평안은 절대로 우연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거잖아요 아사왕은 자신과 백성 안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요소들을 최우선적으로 모두 제거하는 일을 하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았다는 거고 이렇듯 하나님을 찾는 자들로 신앙의 회복을 이룰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셨다는 거지요
평안에는 두 종류가 있음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첫째 평안은 주님의 평안입니다.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을 몰아내는 평안이라는 거지요 둘째 세상이 주는 평안인데 근심과 두려움 앞에서는 이 평안이 제대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굽니까? 당연히 근심과 두려움을 몰아내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평안은 요14: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근심을 물리치게 하시는 평안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겐 어떤 분이십니까? 요14: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신 예수요 그리고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신 예수요 사망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근심과 두려움을 몰아내 평안 가운데 거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사카키라는 작은 마을에 태어난 미즈노겐조는 안타깝게도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질에 걸려 고열로 고생하다가 뇌성소아마비장애를 갖게 됩니다. 미즈노겐조는 할 수 있는 일이란 눈을 깜짝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미즈노겐조에게 미야오목사님을 통해 성경한권이 전해지면서 성경을 보기시작하면서 미즈노겐조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예전과 달라졌는데 누워있는 내내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한 얼굴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의 어머니는 미즈노겐조에게 글자를 보여주고 겐조가 눈을 깜빡이면 그 글자를 어머니가 쓰고 하는 과정에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하곤 했는데 그 중에 한 시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한 번도 드높게 크리스마스를 기쁘게 찬양해 본적이 없다 한 번도 크리스마스 축하 인사를 한 적이 없다 한 번도 카드에 메리크리스마스라고 적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그래도 눈과 바람이 때려대는 방에서 마음속으로 찬양한다. 나 자신에게 인사한다. 눈꺼풀 뒤쪽에 쓴다. 구원의 아들의 탄생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쁘게 축하한다.> 복음이신 우리 예수님은 눈만 깜빡거리는 심한 뇌성마비장애를 앓고 있는 미즈노겐조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당신의 평안으로 평안케 하고 감사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다왕 아사 역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들을 마음속에서 몰아내기 시작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아사와 아사가 다스리는 백성과 나라에까지 주신 것을 깨달으며 먼저 우리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들을 우리 마음속에서 몰아내기를 시작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절을 보시지요 <아사가 일찍이 유다 사람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나니 우리가 이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그들이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더라> 유다 왕 아사가 유대인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음으로 얻은 것이 뭐라고 말합니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사방에 평안을 주셨다>는 거지요 그래서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형통한 성읍건축이었습니다.
여기서 깨닫는 것이 뭡니까?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깨어있으면 문제 앞에 무엇이 옳은지를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인식하게 된다는 거 아닙니까?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를 찾았다는 거지요 여기 <찾다> 히브리어 <다라쉬누>의 원형이 <따라쉬>인데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다>니까 <집요하게 뒤쫓는> 의미라는 겁니다. 여호와를 찾는다는 의미를 시42:1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 위해 필사적인 거처럼 유다의 왕 아사의 삶은 <여호와를 필사적으로 찾는 삶>이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에게서 배우는 것이 뭡니까? 여호와 하나님 자체를 얻으려 하였다는 거지요 시34:10절에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기자 역시 여호와를 찾는 것이 주가 되었다는 거잖아요 하나님은 그런 아사에게 좋은 것 중에 좋은 것 사방에 평안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살면서 힘을 잃어버린 성도들이 우선 취해야 하는 것이 뭐라는 겁니까? 여호와를 찾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문제를 극복하는 길은 문제와 씨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호령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데 있음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어느 가정에 부모님들은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정신없이 뛰느라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불량배들과 어울립니다. 기도도 하고 설득도 해보지만 아이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인 교포2세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억지로 마지못해 참석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큰 은혜를 경험한 아들이 울면서 아버지 품에 안깁니다. 한 집에 살았지만 남남처럼 살던 부자가 비로소 진심으로 하나가 된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게 아닐까 싶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과 한 지붕 밑에서 남남처럼 살 수 있다는 거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 극복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필사적으로 따르는 하나 되는 모습인줄 믿습니다. 신학자 폴틸리히는 <하나님의 임재가 뚫고 들어가지 못할 인간의 상황은 없다>고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찾듯이 우리 또한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 아사와 같은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절을 보자구요 <아사의 군대는 유다 중에서 큰 방패와 창을 잡는 자가 삼십만 명이요 베냐민 중에서 작은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자가 이십팔만 명이라 그들은 다 큰 용사였더라> 아사의 군대가 모두 오십 팔만명이라네요 왜 갑자기 군대이야기일까요? 9절에 <구스 사람 세라가 그들을 치려하여 군사 백만 명과 병거 삼백 대를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그랬었네요. 그동안 여호와를 찾았기에 경험했던 아사와 백성과 나라가 경험한 것이 평안이었었는데 에디오피아의 세라가 애굽의 백만 군사와 지금의 탱크와 같은 무기 삼백기의 병거를 앞세우고 쳐들어왔다는 거 아닙니까?
무슨 문제일까요? 하나님을 찾는 신앙을 가졌음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된다는 거잖아요. 이에 대해 일단 아사는 10절에 <아사가 마주 나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전열을 갖추고> 피하거나 비굴해하지 않고 맞서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면서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는 역시 가장 필요한 순간을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준다는 거잖아요 11절에<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을 찾는 자 아사가 지금 문제와의 씨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기도의 씨름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부르짖어> 히브리어 <와이크라>의 원형이 <카라>인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목청을 돋우어 외치는>이란 의미거든요 그렇다면 유대 왕 아사는 이 상황이 매우 급박하고 위험하고 위기라고 여겼다는 거고 그래서 깨어 있다는 것이 뭔지를 그래서 정말 급한 것이 뭔지를 기도하는 것으로 보여주잖아요. 아사의 기도 내용이 아주 뜻 깊게 와 닿습니다.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이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강한 자든지 약한 자든지 하나님의 도우심은 구별이 없으십니다.>라는 번역이라는 겁니다. 그가 강해도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도우시고 그가 약하되 너무 무력하여도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고 백만의 적을 치려고 왔다는 겁니다. 여기 <의지> 히브리어 <솨안>은 <기대어 쉰다>는 의미거든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여호와는 우리 힘이 없어 쓰러지려할 때 기댈 수 있는 언덕이요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사는 또 뭘 기도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자신들이 지는 경우가 생기면 사람이 하나님을 이기는 게 된다는 기도입니다. 구스 사람 세라가 백만의 군대를 끌고 와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아사가 보는 영적인 시각이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 기도와 고백대로 12절에 여호와께서 싸움의 주체가 되십니다.<여호와께서 구스 사람들을 아사와 유다 사람들 앞에서 치시니 구스 사람들이 도망하는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싸움의 주체가 되시니 백만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백만이 모두 도망하더라는 거잖아요. 2023년10월31일 낼 모레는 마티루터의 종교개혁 506주년 되는 기념일입니다. 그 당시 교황의 말이 법이었고 사회, 정치, 문화 이 모든 것을 교황이 잡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왕도 파면시킬 정도로 큰 권세를 휘둘렀습니다. 그 당시 면죄부를 통해 기부금을 많이 내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된다는 성경에 없는 것까지 동원하여 교황청이 부를 축척하고 있었을 때 마틴루터는 비텐베르크성당에 95개의 부당하다는 반박문을 걸고 종교개혁을 시도합니다. 너무나 거대한 세력 로마 가톨릭과의 싸움에서 연약함을 느끼고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하려는 그의 믿음이 담긴 그가 지은 찬송 시입니다. <내 힘만 의지 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어떤 여성도가 국립암센타에 유방암수술 때문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 주치의 이름이 <강한성>이더랍니다. 하나님이 이 작은 것에서까지 날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시는구나 했다는 겁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 강한성이 아닙니다.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실 수 있는 강한 성이 되심을 믿으시고 이런 하나님과 남남처럼 동거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 찾기를 잘될 때도 어려울 때도 시도 때도 없이 필사적으로 찾는 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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