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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1:1~10절 “우리는 무엇을 위해 호산나를 외치는지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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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작성일 21-03-27 13:43    조회 3,688    댓글 0  
 
마가복음11:1~10절 “우리는 무엇을 위해 호산나를 외치는지 돌아봅니다.” 2021.3.28.
영국의 극작가인 샬롯 키틀리가 대장암과 투병하며 서른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는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글 중 일부입니다. ‘중년의 복부 비만이요? 늘어나는 허리둘레 그거 한 번 가져 봤으면 좋겠네요’ ‘히어지는 머리카락이요? 그거 한 번 뽑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 만큼 살아남는다는 얘기잖아요 저도 한번 늙어보고 싶어요’ ‘부디 삶을 즐기면서 사세요 두 손으로 삶을 꼭 붙드세요. 여러분이 부럽습니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 앞에 서 있는 한 젊은 여성의 생에 대한 아주 애틋한 고백이지요. 그런데 요13:1절이지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뭡니까? 우리 예수님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닷새 후에는 죽을 것을 아셨다는 거거든요 죽음을 아시면서 생에 대한 애착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란 거지요 그렇다면 그가 하신 그 일이 뭔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보시지요.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여기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시기 전 무슨 일이 있었나요? 10장 마지막절인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감람산에 위치한 벳바게 마을 그리고 그 인접한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바디매오가 함께 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이곳에서 예수님이 제자 중 둘을 보내셨다는 겁니다. 2절을 볼까요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흠 없는 대속제물이신 예수님을 태울 자격은 큰 나귀도 힘 좋은 나귀도 잘 생긴 말도 아닌 한 번도 사람을 태운 적이 없었던 나귀새끼였다는 것은 뭡니까? 때 묻지 않은 깨끗한 이미지가 순결하신 예수님과 맞는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나귀새끼를 타시려 했을까요? 예수님은 그동안 그저 인자가 온 것은 하면서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다였었거든요 그런데 나귀새끼를 타시겠다는 이유가 뭘까요. 슥9: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자신이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왕으로 오시는 그 메시아라는 선포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을 향했을 때 첫째가 그가 공의로우시다 둘째는 그는 구원을 베푸신다 셋째가 그가 겸손하신 왕으로 임하신 당신을 선포하기 위함이었다는 거지요 우리도 그렇지요 공의의 예수님 구원의 예수님 겸손하신 예수님을 등에 업은 자가 될 때 저 천성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 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전2100년경 창49:11절에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야곱이 유다에게 축복할 때 암나귀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예수님은 요15: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뭡니까? 나귀새끼를 타시는 예수님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는 거고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보혈에 죄를 씻고 정결하게 되는 말씀의 성취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풀어서 그냥 끌고 오랍니다.’ 나귀새끼가 매여 있다면 주인이 따로 있다는 거잖아요 그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보리니’ 헬라어 ‘휴레세테’는 하나님의 일이나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어떤 사건을 ‘발견하다’ 또는 ‘만나다’라는 의미로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어떻습니까? 볼 것이라는 거지요
3절을 보세요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주가 쓰시겠다’ 여기 예수님이 자신을 ‘주’ ‘퀴리오스’ ‘주인’이심을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밝히고 계심을 본다는 겁니다. 어째서 예수님이 나귀새끼의 주인이라는 걸까요? 바디매오가 외쳤던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과 상관이 있지요 뭡니까? 다윗이 왕이니까 왕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왕이시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창조주로 ‘퀴리오스’ ‘주인’이시고 ‘왕’이시라는 것은 이 세상과 이 나라의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나귀새끼 역시 예수님이 주인이셨다는 겁니다. 왕으로서 창조주로서 나귀새끼를 요구하셨다는 거지요 그리하면 나귀주인이 뭐랍니까?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실제 주인은 퀴리오스 주로 불리우는 예수님이시고 나귀새끼를 매놓은 주인은 사실상 주인의 것을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겁니다. 우리 종려주일을 맞아서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의 주인은 창조주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가 맡겨주신 것들을 잘 사용하다가 빈손으로 가는 청지기임을 기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절을 볼까요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제자들이 나귀새끼를 풀었다는 거고 5절에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나귀새끼를 풀 때 거기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데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나귀새끼를 풀고 있는 모습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위와 그 말씀에 오로지 믿음과 순종을 보이고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 다음 6절을 보세요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주가 이르신 말이 뭡니까?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니까 그들이 허락하더라는 겁니다. 여기서 깨닫는 것은 주님의 말씀 그대로면 충분하다는 거지요 인간의 말로 보충할 것도 수정할 것도 없었다는 거지요 예수님의 하신 말씀 그 자체가 바로 능력이었다는 거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딤후3:15절에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롬1: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말씀 그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10절을 볼까요.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님의 놀랍기만 하신 신적 예지를 경험한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대속을 이루시기 위해 들어가시는 왕이신 예수님을 위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타시도록 신속하게 자신들의 겉옷을 나귀위에 깔았다는 거고 나귀새끼에 오르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향해 전진해 가셨을 때 이미 여리고에서부터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왕이신 예수님을 연호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 헬라어 ‘폴로이’ 말 그대로 ‘수많은 인파’가 자신들의 겉옷을 펴서 주단을 깔아 드렸다는 거고 헬라어 ‘알로이’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연한 종려 나뭇가지를 길에 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앞서가는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선창하면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오는 조상 다윗의 나라여’ 후창을 하고 그러면 앞서 가는 사람들이 다시 받아서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렇게 주고받으면서 행진해 나갔다는 겁니다. 시118:25절에 나오지요.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기 ‘이제 구원하소서’가 히브리어 ‘호쉬아나’ 이고 헬라어론 ‘호산나’잖아요. 무슨 구원을 바랐습니까?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다시 오기를 바랐다는 거잖아요. 그러나 예수님 이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분명한 이유는 오직 하나지요 마1: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만왕의 왕이신 이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어 죽으시려고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자기백성 삼으시려는 때문에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이었다는 거지요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 당시 호산나를 외쳤던 유대인들처럼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호산나’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아니지요. 당신이 공의를 위해 나귀새끼를 타셨듯이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나귀새끼를 타셨듯이 겸손하셔서 나귀새끼를 타셨듯이 내 희망을 이루시는 그리스도를 꿈꾸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 같은 관계를 위해 ‘호산나’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의 나라처럼 이 나라가 회복되기를 원해서 ‘호산나’를 외쳤던 그 허다한 사람들은 한 사람의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시려 오신 예수님을 알게 되자 자신들의 목적과 부합되지 않은 것을 알고 안면을 바꿔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겁니다. 아닙니다. 공의를 이루시려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 구원을 완성하시려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 겸손하셔서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며 새 예루살렘 저 천성을 향해서 나가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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